귀농과 귀촌

[청년 귀농 실천 가이드 #54] “혼자 할 수 없는 귀농의 현실 – 공동체에서 내 역할은?

윤복E 2025. 7. 14. 18:39

시골에서 찾는 나의 역할 -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귀농 이야기

귀농을 준비하면서 ‘혼자 하는 일’이라는 환상은 꽤 오래갔습니다. 도시에서 늘 혼자서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했던 삶의 방식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저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품앗이’와 ‘협동’이라는 말이 단지 따뜻한 개념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생존 기술이라는 걸 체감한 후로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역할이 없는 사람은 관계도 없다

도시에서는 역할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직장, 상점, 아파트 커뮤니티는 대부분 기능 중심이라, 굳이 관계를 맺지 않아도 생존엔 큰 문제가 없죠. 하지만 시골은 그렇지 않다.

이웃과의 관계, 마을에서의 참여, 농번기 품앗이 등 모든 삶의 기반이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내가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가 그 마을의 일원이 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마을에 이사를 온 이후, "나는 이곳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존재의 조건이 되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해 젊은 노동력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귀농인은 단순히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마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시작: 내가 찾은 역할

완주에서 한 달 살이 중,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농사도 서툴고, 장비도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얇았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 덕분에 저는 작은 일에서 역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마을 행사 포스터 디자인하기
  • 젊은 농부들의 SNS 홍보 도와주기
  • 마을회관 청소 날짜 정리해 엑셀로 일정표 만들어드리기
  • 어르신들이 어려워하던 스마트폰 설정 도와드리기

이런 일은 전문적인 농업 기술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었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고마워해주셨다. 도시에서 쌓은 경험들이 시골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더 놀라운 건, 이런 작은 일들이 점점 더 큰 기회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포스터 한 장을 만들어드렸더니, 다음에는 마을 홍보 브로셔 제작 의뢰가 들어왔고, 스마트폰 설정을 도와드렸더니 마을 어르신들의 디지털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해달라는 요청도 받아 작은 신뢰가 쌓이면서 점점 더 의미 있는 일들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역할은 꼭 농사만이 아니다

예비 귀농인이라면 ‘나는 농사를 못해서 도움이 안 될까봐 걱정’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시골에서 필요한 역할은 훨씬 다양합니다.

  • 기록자: 마을의 역사나 행사, 농사 일지를 정리하는 사람
  • 기획자: 마을 체험 프로그램이나 교육을 기획해 제안하는 사람
  • 연결자: 도시 소비자, 청년 네트워크, 정책 기관과 마을을 연결하는 사람
  • 디지털 담당자: 홈페이지, 블로그, SNS, 영상 편집 등 마을 홍보를 도울 수 있는 사람
  • 교육자: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프로그램이나 성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
  • 문화 기획자: 마을 축제, 문화 행사, 소모임 등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람
  • 통역자: 외국인 근로자나 다문화 가정을 위한 언어 지원을 하는 사람

저 역시 농사는 아직 멀었지만, 콘텐츠 제작, 글쓰기, 사람과의 연결을 통해 마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 있다.

역할을 통해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삶이 된다

재미있는 건, 마을 분들이 저를 부를 때 “귀농 준비하는 청년”이 아니라, “포스터 잘 만드는 친구”, “지난번에 컴퓨터 고쳐줬던 친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작은 명칭 변화 속에서, 저는 ‘손님’에서 ‘이웃’으로 바뀌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제가 이 마을 안에서 작지만 분명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변화가 있었다.

 

 

예비 귀농인을 위한 마을 역할 찾기 팁

1. 마을에 필요한 일부터 관찰하자
잔디 정리, 쓰레기 분리, 회관 정리 같은 자잘한 일 속에 마을의 필요가 숨어 있었다. 일단 함께 움직이며 눈으로 관찰해보자. 마을 사람들이 어떤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2. 내가 잘하는 걸 연결해보자
디자인, 사진, 문서 작업, 영상 편집, 문서 정리 등 도시에서 익숙했던 일들이 시골에선 큰 도움이 될것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당신에게는 일상적인 기술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도움일 수 있다.

3. 먼저 제안해보자
"제가 포스터 한 번 만들어볼까요?", "이 일정을 정리해드릴까요?"처럼 작게라도 먼저 말을 걸면, 환영받을 가능성이 크다. 적극적인 자세가 관계 형성의 첫 걸음이 될것이다.

4. 역할을 ‘성과’가 아닌 ‘관계’로 바라보자
결과보다 중요한 건, 그 일을 함께 하며 쌓이는 신뢰이다.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관여하면 관계도 함께 성장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진정성 있는 참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5.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하자

마을에서의 역할은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최소 1-2년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성급하게 결과를 기대하기보다는 꾸준한 관계 형성에 집중하자.

6. 세대간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자

젊은 귀농인은 자연스럽게 기존 마을 주민과 새로운 아이디어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르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시각과 기술을 조심스럽게 제안해보자.

 

혼자 농사짓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삶

귀농은 더 이상 나만의 프로젝트가 아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 사회의 일부가 되는 일이며, 함께 살아갈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그 안에서 내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을 찾고, 그 역할을 통해 서로의 삶을 보탤 수 있을 때, 비로소 귀농은 자립이 아닌 ‘공생’의 여정이 된다.

혼자 할 수 없는 귀농의 현실

앞으로도 저는 이 마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역할들을 찾아가며, 진정한 농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다른 예비 귀농인들과도 나누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